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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영화 리뷰

아가씨는 무엇으로 사는가? - 아가씨 리뷰

[Nac] 2016. 8. 5. 07:21

아가씨 리뷰


3명의 조선인과 1명의 일본인. 오직 아가씨 혼자만이 일본인이고 주위의 3명은 모두 조선인이다. 일본에 대한 각기 다른 캐릭터들 감정의 채도를 주목해볼만 하다. 양끝에 코우즈키와 숙희가 있다면 가운데 백작이 있는 모습으로 영화는 색을 칠해간다. 





이는 아가씨, 히데코를 둘러싼 욕망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히데코라는 하나의 인물을 대하는 각기 다른 인물들의 욕망들..







그렇다면

그들의 욕망에 부딪쳐지고 있는 히데코는 어떤 욕망이 있는가. 죽음일까?

결국 자신을 둘러싼 욕망 중 누군가를 택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의 아가씨.

두번째 선택지인 백작을 택했지만 정말이지 비지니스적 관계였다.


하녀의 등장이후 인간에 대한 시험. 분노와 사랑의 감정 속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선택지에서 또다른 선택지가 나타난다.


그러고 보면 대상은 다를지라도 각기 분노와 사랑의 감정은 끓어 오르는데

선택지의 결과를 생각해보면 아가씨가 택한 선택지는 뻔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뻔한 결론이 그저 기다리기만 해도 얻게되는 것은 아니었다.


히데코는 사랑을 욕망했다.


죽음이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볼때

죽음을 시도함으로서 개인의 욕망을 부수고 사랑을 하게 한 것.

자신을 연민하고 사랑했지만 욕망을 이기지 못한 하녀에게 사랑을 갈구한 것이다.


단순히 일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거울로 비추는 듯한 가엾음과 모성애. 사랑. 

마지막 정사 장면에서 이런 모습은 극대화된다.


아니, 아가씨는 거울이었다.

자신을 망가뜨린 코우즈키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찢어발겨주었고,

자신을 속이려든 백작에게는 죽음까지는 아닌 사기를 쳐줬다.

그리고 결국 자신에게 사랑을 준 숙희에게는 사랑을..




130여년전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오르던 영화였다.

신이나 남성위주가 아닌 여성 자기 자신이 선택당하는게 아닌 스스로 

여성을 대상으로 택하고 갈구함으로서 쟁취하는 모습은 변화하는 시대상일까.

아니면 반복되가는 역사 속 순환의 일부일까. 




좀더 들어가 보자라는 말을 꺼내기가 좀 무섭다. 터부라는게 다 그런것 아니겠는가.



영화는 몇가지 터부를 건드린다.

음지에 있어야 할 것들은 음지에 있어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인데, 오해받기도 쉬운 표현이다.


금기시 되는 것들은 양지로 나오면 안될 것이라는 것인데..

누군가는 영화에 있어서 여성성이 부각되는 것을 금기로 생각했다면 

패미니즘적 영화를 만들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가 될테니 말이다. 동성애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친일은 어떠할까?

한국에 있어서 친일이라는 단어는 터부시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랫도리는 친일이다. 이정도의 비속적 표현만 통용될 수 있는 현실이다.

다른 경우에는 어떨까. '친일이다' 라는 말을 풀어 '나는 일본을 좋아한다' 라는 문장을 입으로 되뇌어 봐도 응축된 파급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친일이라는 터부를 요사이 느낀 건 롯데 회장님의 어색한 한국어를 들은 한국사람들의 반응과 이후 롯데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대형태극기를 월드 타워에 건 사건에서였다.


그리고 SM? SM이라고 말하기는 그렇다. 영화의 표현을 빌려 '사드풍'이라 칭하자.


그러한 사드풍의 문화를 자극적으로만 양지로 내보내는 것이 맞는 것일까라는 생각은 든다.

사드풍의 그것들은 단순히 Sadism으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은 잘못됬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감독의 말대로 금기를 고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깨기 위해 선봉에 세운 것일까.

금기들은 별로 중요치 않게 흘러간다. 패미니즘적 부분, 동성애적 부분은 물론 친일적인 요소들도 사드풍의 강렬함과 복수의 내러티브에 뭍혀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일까. 라캉을 들고와보자 칸트를 Sadism과 같은 위치에 둔 그에 따르면 Sadism은 세계의 질서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맞서싸우는 윤리의 시발점이었다. 



금기는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해 아이디어 자체의 위험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식인이나 근친. 분명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무언가에 의해 일어났었고 일어나기도 하는 것들이지만 분명 아이디어 자체의 위험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동성애나 패미니즘, 친일, 사드풍도.. 개념자체가 위험한 것일까.


누군가는 그 자체가 위험하다고 할것이다. 예를들어 종교관련 동성애반대자는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종교도 언젠가는 금기시 되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금기는 시대의 또다른 거울이다.



요새는 그 금기를 교묘하게 자신들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또 아이러니하다.

소위 '읍읍'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읍읍이 무엇인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았을때 나오는 소리가 아닌가. 자기입을 틀어막았든가, 아니면 누구의 입을 틀어막았든가.








각설하고 다시 영화 전체를 보면 너무 짧은 것 아니면, 편집이 심하게 된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부족하다. 이정도로 해야 개봉은 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자극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감정에 녹아들 내러티브가 부족한게 아닐까. 이를 가는 장면에선 배우들의 연기로 자연스럽게 젖어드는 것이 아닌 머리로 장면에 대한 이해를 해야했지 않나싶다. 나쁘다기 보단 부족하다 부족해.


마치 삽화가 찢어진 코우즈키의 책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쉽다. 난 박찬욱이 한손에는 대중성을 한손에는 예술성을 가득쥐고, 내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쉬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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