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의 시선

라쇼몽 - 자기파괴적 문학천재 본문

Review/도서 리뷰

라쇼몽 - 자기파괴적 문학천재

[Nac] 2017. 11. 8. 12:50

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Nac지수 - 7.9


 라쇼몽(羅生門). 시가지를 둘러싼 성의 문이었던 나성문이 폐허가되어 시체를 버리는 용도로 쓰이면서 민간에서 나생문으로 쓰기시작했다는 라쇼몽. 라쇼몽은 결국 나찰, 악귀가 사는 문으로 읽힌다.


 라쇼몽 단편집 안의 라쇼몽뿐만 아니라 코, 지옥변, 덤불속, 갓파 등 많은 작품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줄곧, 변함없이 인간에 대해 냉랭한 시선을 보낸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며, 행한 선은 사실은 선도 아닌, 선이 흔들려 악이 되는 수준도 아닌 내로남불의 존재이며 어리석고 추악하다.



 고통만이 가득한 이세상에서, 냉랭한 시선으로 써내려간 작품들은 기괴하면서도 섬찟하다. 처음 라쇼몽은 이게 뭔가 싶은 단편이지만 곱씹어보면 우리네 모습은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뽑고 남자에게 옷을 빼앗기는 노파로 집약된다.




 다른작품들이 일견하기에 이상하다하고 넘어갈지 몰라도, 단편 '덤불속'은 쉽게 넘어갈 수 없다. 냉랭한 시선의 문학천재가 천재적 소양을 한껏 드러낸 작품. 더욱이 더 유명한 것은 라쇼몽과 덤불속을 혼합해 더 완벽한 작품으로 구성해낸 영화 라쇼몽이다.


 조금은 불친절한 소설도 좋지만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단순복제가 아닌 제대로 해석해낸 작품 라쇼몽은 여전히 냉랭한 시선속에서 같은 사건에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왜곡된 진실을 이야기하는 인간을 그렸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멋진작품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인간성에 대한 희망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아이를 자기가 데려가 키우겠다는 나무꾼에게 스님이 하는 "고맙소. 당신 덕분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역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된 이야기이며, 미소띈 나무꾼에게 비추는 햇빛은 관객에게 이제 그만 불편함에서 벗어나라고 속삭이는 나생문의 악귀다. 이를 통해 영화는 완벽하게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를 라쇼몽에 집어넣는다.


 


 지금에 있어 비인간성에 대한 반박을 하자면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쇼몽이 그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그리는 비인간성은 인간성의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렇기에 라쇼몽은 수작을 넘어서는 반열에 올라섰다고 본다.



 하지만 작가 자신에게는 이런 소양이 드러낼 수록, 천재적인 소양이 발현될 수록 자기파괴적 결말에 다다르고야만다. 그리고 결국 고통만이 가득찬 이 세상에 자살로 하직을 고한다. 


 사람들이 이런 자기파괴적인 요절한 천재를 좋아하는 것은 희소함과 아쉬움을 넘어 혹시 인간에게 감춰진 비인간성에 대한 선호는 아닐까. 아니면 단순한 시대의 상흔일까.




우리의 현실을 봐도 헬조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헬, 지옥. 나생문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악귀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 될까만은 류노스케가 그리는 비인간적인 모습. 작품에서도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서도 말하는 '멍청하고 질투심 많고 추잡하고 뻔뻔스럽고 저만 잘난 줄 알고 잔인하고 이기적인' 모습은 앞서 말했듯 인간적인 모습의 다른 말일 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선할수도 있지만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다. 


 아니 류노스케 역시 이를 알았다는 생각이든다. 그의 작품이 어느정도는 우화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오해다. 그는 비인간성을 나무라지 않는다. 훈계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싫어했다.


 오히려 그랬기에 류노스케는 줄곧, 한결같이 냉랭한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의 글은 우화이기는 커녕 냉소 속에서 그저 현실의 고통에 몸부림쳤던 흔적일런지 모른다.



 근데 그게 뭐가 그리.. 로 시작되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나도 악귀가 다되긴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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